지난 남산의 부장들 실제인물 소개 다음으로 남산의 부장들 실화속 이야기 10.26사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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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은  475만명의 흥행성적을 기록하여 2020년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한 영화입니다.

또한 2021 41회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백술예술대상에서 예술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등 걸출한 시상식에서 수상한 2020년 최고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남산의 부장들 실화 10.26사태

1026사태

10.26사태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피격한 사건입니다.

가해자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이며,

피해자는 대통령 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 경호처장 정인형, 경호부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관 김용섭, 대통령 운전기사 김용태, 경호원 수십명 등이 있습니다.

 

 

< 사건의 발달 : 박정희 정권의 위기 >

박정희 정권은 대외적으로는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과의 불화가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이라는 기치 아래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로비스트 박동선을 이용해 이런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계획하게 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외적 정당성이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78년 총선에서 김영삼의 신민당이 집권여당을 총 득표수에서 이기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는 김영삼으로 하여금 박정희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김영삼은 1979년 9월 12일,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박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라고 발언하였고 이 발언을 빌미로 10월 4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하였습니다.

 

또한 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부마항쟁이 일어났습니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으며,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이 부마민주항쟁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방식을 놓고 집권층 내부의 갈등심화 되었다고 합니다.

김재규 1026사태 이후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고 판했으며,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발언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대내적, 대외적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김재규와 같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들은 '혹시' 하는 불순한 생각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박정희가 정권 초기나 70년대 초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리 김재규라 하더라도 그의 분노를 함부로 표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79년의 상황은 김재규가 분노를 조절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부마 민주 항쟁을 두고 본인이 직접 유혈 진압을 지시하고 거기에 킬링필드 운운하는 초강경파 차지철을 두둔하는 등 강경 대응을 천명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외교적 상황은 일본은 김대중 납치와 문세광 암살 미수로, 미국은 코리아 게이트와 핵 개발로 매우 껄끄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혈 진압을 하겠다는 행동은 정권 주변인, 특히 김재규 같이 정보기관 인물로서는 전형적인 남베트남 같은 파멸 행보로 밖에 읽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료 : 연합뉴스

 

 

<10.26 사태의 생존자>

여담으로 10.26사태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목격자가 있는데요. 바로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였습니다.

신재순과 심수봉이었는데 신재순은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눈과 마주쳤을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그가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 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 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대통령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 하고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이후 가수 심수봉은 1980년 가수 활동을 금지당하다가 1984년 복귀하였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간 후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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